•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장 1절에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라고 하시는 말씀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간단하게 기록된 말씀 같지만 그뜻과 의미를 제대로 알려고 하면 무척 복잡하다. 다시말해서 인간의 논리로는 잘 이해가 되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 말씀에 비추어 보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는 일이 중요하다.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일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죽었다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니까" 너희들 눈앞에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너희는 절대로 놀라지 말라는 차원에서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선생이 죽는다는 말에 그만 안절부절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상황에서 그마나 자신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것은 그나마 예수가 자신들과 같이 동행을 했주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예수가 갑자기 죽겠다고 말을 하니 그들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께서 다시 살아난다고 말을 하지만, 한번 죽은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냐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다. 

이런 미미한 인간의 생각 차이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벌벌떠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수많은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었지만, 그런것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예수가 죽고나면 자신들이 유대인들로부터 당할 화만 생각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시는 말씀으로 그들을 달래고 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들이 이 정도이니, 나머지 유대인들이야 얼마나 빈껍데기로만 하나님 이름만 부르고 있었겠는가? 그래서 바리새인들, 서기관, 율법사, 제사장들이 그토록 율법에는 열심을 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보내 아들은 믿지 않아서 모두가 멸망으로 갔던 것이다. 그들이 진짜로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을 공경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를 이단괴수라 하여 십자가에 죽는데 내어주고 말지 않았던가?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예수를 믿고,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얼마나 교회일에 열심인지 모른다. 주일성수부터 시작하여 십일조 생활, 새벽기도회, 교회에서 하는 충성, 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매주마다 양로원을 찾아가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본다. 그리고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를 보면 입던 외투라도 벗어주는 사람이다. 그렇게 열심인 사람앞에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 아들이 나타나서, 당신이 육신으로 하는 법은 잘지켰는지 모르지만, 당신은 성령의 뜻대로 살지 않은 죄인이라고 말을 해주자 단번에 얼굴색이 변하면서 얼굴이 굳어지더라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 아들의 말을 듣고 얼굴색이 변한 것은, 순전히 자기의 의로 그런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마음이 부패한 죄인임을 알고 그런일을 했다면 그는 아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얼굴색이 그렇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음이 부패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른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논리에 빠져서 그런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하고 다닌것이 모두 자신의 의가 되어서, 아들이 그런 말을 해주었을 때, 기분이 나빠 얼굴색이 변했던 것이다.

또 예수님 제자들처럼 이곳에 있는 자들중에는 아직도 이 강단을 주님께서 쓰시는 강단으로 믿지 못하여 무슨일을 시킬 때마다 벌벌떨고 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네 스스로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 주어도 소귀에 경 읽기다. 절대로 강단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죽어도 자기 자신이 그 일을 해놓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일은 아무리 그것이 그럴듯 해보여도 결국은 실패작이다. 

가령, 강단에서 남편을 사랑하라고 했다면 그것은 외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몇번 해보다가 안되면 그것을 빨리 깨닫고 강단의 주님앞에 두손들고 나오면 될텐데, 죽어도 자신은 그것을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이다. 마음이 부패한 인간이 성령의 뜻마저 모두 거역하고 자신 스스로 어떻게 남편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인가? 하루 이틀은 꾹 참고 사랑한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남편의 빗발치는 잔소리에 삼일을 넘길자가 없다는 것이다. 묘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누구도 자신이 진정한 죄인이라고 손들고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놀랍다.

자신이 진정으로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고 나오는 자라야, 맷돌 사이에 넣고 갈 수 있을텐데, 아직도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수로 저들을 맷돌속에 집어넣고 갈아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것인가? 주님으로부터 맷돌로 쓰임받고 있는 강단도 암담하기만 하다. 

저들이 맷돌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를 강단에 전적으로 맡기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예수님)의 속성을 믿는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내세운 이 강단을 믿고 자신을 전적으로 이 강단에 맡기라는 것이다. 그래야 강단에서도 마음놓고 저들을 맷돌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은 죽어도 맷돌속에 들어갈 수 없다하여 맷돌 주변만 맴돌아서는 절대로 온전한 자로 거듭나지 않게 될 것이다. 말로 떡을 하면 조선사람이 다 먹는다고 했듯이, 아무리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 이름을 부른다하여도 예수의 삶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헛것이다. 예수의 삶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수의 영을 내마음속에 모셔야 한다. 그것이 바로 죄악된 내 자신을 맷돌속에 넣고 가는 작업이다. 이 직업과정을 거친자만이 비로소 온전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신실하신 분임을 믿거든, 그가 세운 강단임을 믿고 이제부터라도 전적으로 나 자신을 이 강단에 맡기고 이 강단에서 무엇을 지시하든지 그대로 따라서 해야 할 것이며 설사, 따귀를 때리고 머리체를 잡아 휘둘리더라도 나를 이 강단에 맡겼으면 다시는 나를 찾아가려고 하지 말라! 나를 찾아가려고 하는 순간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선화 성도의 과정을 잘살펴보고 그것을 머리속에 늘 기억해라! 그래야만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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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30 21:13
조회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