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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시키는 대로의 순종과 선택의 여지!

시키는 대로의 순종과 선택의 여지!

본문: 마태복음11:28-30



빛과 어둠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관점과 인간의 생각 즉 나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예를 들어 빛과 어둠 또는 구원과 행복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인간(나)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인생아! 나는 창주주이며 선의 근본이자 기준이다. 그러나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마귀가 주는 대로 선악과를 따먹고 말씀을 거역 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다 끝난 상황이다. 따라서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 땅 아래서 아무리 노력하고 열심히 일하고 배워서 벗어나려고 한들 거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으며 지혜가 나오겠느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땅의 지혜가 하늘 것만 못하다. 허니 네 뜻대로 살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대로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약3:17-18).


그러나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빛과 어둠과 구원과 행복은 자신이 뭔가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여 옳은 모습과 성공한 모습 또는 착한모습을 보여 그것을 기준삼아 빛과 어둠이라 생각하고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본을 보이는 믿음과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자기 기준에다가 정해놓은 것일 뿐, 진정한 하나님의 빛(선)이 아닌 것이다.


인간들끼리 설령 ‘선’을 행한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가지고 싶고 누리고 싶고 하고 싶은 욕망과 욕구가 있는데 그것을 숨기고 겉으로만 참고 할 뿐이다. 결국 나도 상대의 속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당신도 나의 속을 건드리지 말자는 뜻에서 서로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자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본심 속에 있는 이기적인 것이 드러나면 사람들로부터 융화되지 못하고 혼자 독단적으로 살아가야하는 욕을 얻어먹은 것이 싫기 때문에 자신의 본심을 수면 아래로 감추고 미덕과 겸손과 학문으로 포장하여 사람들과 융화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선(빛)과 행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바라보시는 입장과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입장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커서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선택 하셔서 율법과 선지자를 주시면서 율법대로 따라서 살라고 하셨다. 이들은 율법을 지키면 천대가 복을 받지만 만약 지키지 못하고 어기게 되면 율법에 명한대로 저주를 받고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또한 이들은 민족전체가 태어나면서부터 율법아래서 태어나서 율법아래서 살아가기 때문에 이들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는 율법과 하나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자유의지가 없이 일방적이고 직선적으로 이끌어 오신 것이다. 그 좋은 예가 구약에 모세오경과 율법의 613가지 중 하라! 하라! 365개와 하지마라! 하지마라! 248개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자유의지와 선택의 여지가 없이 율법을 지키면서 선지자가 전해주는 하나님말씀을 “시키는 대로만 하면” 구원이 된다.


그러나 이들도 시간과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이방인의 문화와 문명을 접하다 보니 세상의 문물이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율법을 지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선과 악의 싸움에서 선택의 여지 기로 점에서 자유의지가 발동이 된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없는 율법생활로 점점 퇴락해가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되어 급기야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이 나고 암흑(자기의 생각과 주권 죄악)이 이들을 덮친 것이다.


하여 이때부터는 율법으로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새로운 ‘선의 기준‘ 으로 다시 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온 이후부터는 다시 새롭게 되어 이들도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꺾고 자기의 생각으로 살지 않고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만이 영생이요 생명인줄알고 그를 믿어야 구원에 이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부패한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어 보겠다고 주장하는 이들(바리새인부류)과,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여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죄에 매여  고통당하며 사는 백성들을 향해 자신을 믿고 나와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말씀 하시는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애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그러나 이방인들은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살아 왔다. 따라서 각자가 자기 개인이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우선순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족의 트라우마가 있는 자는 자신의 가족을 중히 여겨 하나님 보다가 가족을 먼저 생각하고 챙기게 된다. 또한 먹지 못하고 살아온 자는 먹는 것에 집착할 수도 있고 또한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자는 자신이 즐기는 것이 하나님보다 우선순위가 될 수가 있다.


이방인들이 이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이름을 부르고 그 피로 인하여 성령(영적인 율법)을 받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보지만, 하나님보다도 자기만의 가치관이 훨씬 더 크고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에 “성령의법”을 따라서 사는 것이 우선순위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처럼 율법의 보호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우선순위가 되어 성령을 온전하게 따라서 살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제한받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선과 악’의 기로에서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할 것 인지 말 것 인지를 ‘선택’을 해야 한다.


또한 이방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선’의 기준이 없고 율법으로 보호를 받은 적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한다할 지라도, 목적이 자기가 살아가기 위한 목적이 된다. 예를 들자면 아무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자가 그것이 싫어서 열심히 기도하고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또한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것이 한이 되어 열심히 기도하고 배워서 높은 지위까지 올라가서 성취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부르짖으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니 그것이 믿음인줄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한 종교적인 생활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눅18:1-8).


정리를 하면 구약에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들이 믿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라! 하지마라! 시키는 대로 살면 구원이 되고 불순종하면 저주와 죽음이라는 말씀으로 명령만이 있었다. 그래서 이때는 ‘자유의지를 따라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만 하면 구원이 되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이미 이들에게 세상문물이 들어오면서 타락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선과 악의 구별된 말씀을 듣고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선 것이다.


따라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가 설명 되어있다. 하여 이때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택한 후에는 다시 자신의 자유의지를 쓰지 않고 예수께서 "시키는 대로"와 성령의 뜻대로 살면서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온전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들도 성령을 온전하게 따라서 살면 구원이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우선순위가 되는 자아(죽은 영)때문에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처음에는 성령이 충만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은 타락으로 가는 것을 본다.


또한 아무리 성령이 충만한 자라도 자기를 지켜주는 ‘그리스도’가 마음속에 없기 때문에 결국은 세 가지 시험(돈, 여자, 명예)에서 지고 마는 것을 보게 된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벧후2:19).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처럼 자유의지를 제한 당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죽은 영)를 따라서 살아왔기 때문에 유대인들처럼 성령을 온전하게 따라서 사는 것이 쉽지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과 같은 동일 인줄알고 구원받은 것으로 잘못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의 영으로서 법과 엄위와 위계질서를 주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죄악을 중보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성령(하나님의법)을 따라서 살지 못한 죄악 때문에 멀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보 하여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온전한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율법을 받아서 백성으로서의 신앙생활을 하는 첫 단계일 뿐이다. 이방인들은 자기기준과 가치관이 우선순위가 되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꺾고 성령을 따라서 살기 보다는, 결국 자신의 자유의지가 성령의 뜻보다도 우선순위가 되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을 보면 세 가지 시험 중 돈에서 이긴 자는 여자에게서 넘어지고, 또한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는 자는 결국 큰 교회를 짓고 사람숫자 늘려서 성령(하나님)까지 이용하여, 자신의 위상만 높이려 하는 명예에 넘어진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자신 하나는 구원받을 수가 있으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 있는 지도자 즉“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방기독교인들도 성령(영적인 율법)을 받고 신앙생활한지 이천년이 넘어 때가 되었다. 따라서 사도바울에게 빛(영)으로 들어가셨던 예수께서 이방인 앞에 부활하여 영으로 한“인격체”를 입고 오셨다.


이에 이방인들의 선택은 아무리 좋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목적을 선택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위하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이방 기독교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살아 남기위한 목적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의 뜻을 거역하고 왜? 자신이 먼저 우선순위가 되었는지를 빛을 비춰 주시면서 낱낱이 설명해주고 자신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이기적인 것을 추하다 여기고 겸손과 미덕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밥을퍼 주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수면 아래로 내리 깔아 무의식속으로 집어넣고 겉으로는 안 그러는 척!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앞에서는 당신은 창조주 하나님 ‘선’의 기준이시기 때문에 자유를 얻어내기 위해 고상함과 겸손과 미덕이라는 포장지를 이용하여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자신의 이기적인 것과 위선과 욕망이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자신의 추악한 모습은 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방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마음속에 숨어있는 자아(죽은 영)을 꺼내고 ‘자범죄’를 해결해 주러 오신 주님을 만날 수도 없고 성령을 거역한 죄악도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


인간의 근본 된 존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마귀에게 져서 끝이 난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의 추한 속마음이 본질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예나 지금이나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빛 앞에서는 어떤 것도 감추지 말고 사실 있는 그대로의 추한모습을 꺼내놓고 죄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죄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다.


병든 자가 의사 앞에서 자신의 죽게 생긴 병명을 사실대로 말을 해줘야 근본 된 치료를 받을 수가 있게 되듯이, 만일 환자가 자신의 병명을 감추고 건강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고 말한다면, 이 환자는 자신의 병을 고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앞에서도 자신의 마음속에 숨어있는 이기적인 것과 위선과 욕망을 사실 그대로를 직고하여 실토하고 내놓아야, 이방 기독교인들의 병든 마음속(성령을 거역한 영적인 죄)을 치료를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로서 ‘원죄’는 예수께서 흘려주신 피로 해결되었고, 이제 두 번째로 영적인 하나님의아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해결 받고 이때야 비로소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과의 막힌 담이 열리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아가 죽고 없기 때문에 이때서야 비로소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린양이 어디로 이끄시든지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계시록14:4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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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사라

등록일
2023-11-30 19:57
조회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