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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이방인의 예표인 야곱

이방인의 예표인 야곱

창세기 33:1-5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대부분 신실하거나 정직, 또는 순종 잘하는 주님의 종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유독 야곱만은 야비하고, 교활하며, 악착같고, 또 욕심이 많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를 성경의 의인들의 한명으로 내세우셨고 야곱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자손을 번성케 하셨을까?

 

성경을 단순 알레고리적인 개념이나, 단어적 서순적으로만 해석한다면, 단순히 야곱이 천사와 싸워 복을 얻어낸 부분만 의롭다고 해석할 수 있으나, 사실 야곱은 바로 우리 이방인들을 예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며, 우리 이방인들의 습성, 성격, 행실과 모두 닮아있기 때문이다.

 

이삭이 예수를 예표하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죽기까지 순종하며 아버지를 의심치 아니하고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야곱은 살기위해 발버둥치고, 욕심을 부려 빼앗고, 두려워하며 숨는 둥 이러한 모습은 이삭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왜냐하면 이삭은 예수, 즉 유대인들 앞에 오시는 예수를 뜻하고 야곱은 이방인들 앞에 오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태어나자 말자 민족적으로 선택받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안되는 문화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율법의 제제 또는 보호를 받아 시키는 대로 순종만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순종하지 못하면 저주를 받아 외세의 침략을 당하거나 육체가 병에 걸렸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그들이 율법을 어긴 '자범죄'를 사해주시고, 나중에 십자가에 피 흘림으로써 아담이 지은 '원죄'를 사해주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완성시키셨다. 이것이 바로 이삭의 예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은 예수 이름을 부르고 그 피 값으로 마귀 발아래서 나와 아담이 지은 '원죄'를 사함 받았다는 증거로 '성령'을 받았음에도, 언제든지 세상으로 돌아가도 전혀 처벌 당하지 않고 저주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 받은 것만으로는 자기 자신이 통제가 안 될뿐더러, 믿고 안 믿고는 언제든지 우리 선택에 의해 좌우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원죄'는 예수 피로 해결 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우리의 '자범죄'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죄가 남아있어 언제든지 성령을 거역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기독교의 형태가 되어 말뿐인 신앙과 서로 당파를 나누어 누가 더 옳고 그른지를 따지며, 욕망에 눈이 멀어 예수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장사치 수준으로 몰락하게 되어버렸다.

 

이러한 이방인들의 자범죄, 즉 우리가 지은 죄,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우리 자아(죽은 영)을 몰아 내기 위해 이방인들 앞에 또 다시 그리스도가 오셨다. 바로 부활하여 영으로써 우리 야곱같은 이방인들 마음속에 오신 것이다.

 

야곱의 교활하고 욕심 많은 모습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을까? 이는 바로 자신의 더럽고 교활한 모습 즉, 자신의 자아(죽은 영, 자범죄)를 보고 그리스도 앞에 자신을 반납해야지만 그리스도께서 나를 장악하여 그리스도의 그릇으로 쓰시는 것이다. 즉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장악하셔 내가 여태 악에 빠져있었던 곳에서 나를 선으로 이끄시어 내가 지은 죄들을 똑같이 이방인들에게 전하여 죄인 대 죄인으로 만나게끔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자에게 나도 더러운 죄인이고 당신도 더러운 죄인이니 우리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이젠 그리스도로 살아가자!” 라며 우리의 주인을 나 자신(죽은 영)에서 그리스도(산 영)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의 예표로 이방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야곱이 왜 우리의 예표로 오시는지 설명하기 위해, 본문으로 돌아가 위 구절에 야곱의 형 에서가 400인을 데리고 야곱에게 올 때, 야곱이 겁을 집어먹어 자신들의 재물들을 먼저 보내고 그리고 자신의 두 여종, 그리고 레아, 라헬 순으로 자신이 아끼는 것들을 나중에 내보였다. 그리고 결국 목전에 이르러 자기 자신이 나가 에서에게 일곱 번 절하고 입을 맞춘 사건을 보자.

 

이 사건은 우리 이방인들의 겉과 속이 다름을 너무나도 잘 나타내는 예시인 것이다. 먼저 야곱은 우리의 본질과 목숨을 뜻한다. 그리고 라헬, 레아, 빌하, 실바, 재물 순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기 방어, 또는 자기를 포장하여 호의적으로 보여 지길 바라는 자기 희망사항을 뜻한다.

 

무슨 말인지 풀어서 이야기 하자면, 우리 이방인들의 속을 한번 들여다 보자! 우리는 우리의 본능이나 우리의 욕망이 드러나면 그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 개개인의 욕망은 누구나 이기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기심을 드러낸다면 세상(사회)에서 배척당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욕망과 본능, 즉 악한 나의 자아(죽은 영)는 숨겨둔 채 사회에서 배척당하고 따돌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위장하고 포장한다. 그 결과 자신의 이미지를 위해서 사람들은 끝없이 노력하며, 평판과 채면에 신경을 쓰고, 자기가 살아온 방식의 자긍심을 갖는다 그것이 사회에서 내 욕망을 가려줄 커다란 방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자신의 노력과 이미지를 모함하고 자신 속에 들어 있는 더러운 본능과 욕망을 지적한다면, 사람들은 노발대발하며 그 지적하는 상대를 비난하고 죽이려고 들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이 바로 야곱과 우리 이방인의 모습이 닮아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유없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이삭과 이삭의 아들로 야곱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이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앞에 오실 하나님 아들들을 예표하기 위해서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야곱(본능, 욕망, 자신목숨)은 에서(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는 수 겹의 포장들(라헬, 레아, 빌하, 실바, 재물들)로 자신을 감싸고, 방어하는 이기적이고 추잡한 모습이 우리 이방인들과 너무도 닮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예표로써 야곱을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이 야곱의 형태로 오신 그리스도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 가지 결단을 해야 한다. 바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그러한가? 아니한가? 자신이 아는 것들을 의심해보고,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야 한다.

 

마음으로 받는다는 것은 내가 기존의 신앙생활에서 알던 것에 대해 이것이 과연 나를 나아지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나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나를 나아지게 하는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소리다.

 

정말 자기 문제를 해결 받고 자신이 성령을 따라 살고 싶으나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기존 신앙생활이나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야곱의 예표로 오신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달려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나아지는 것, 자신의 문제해결 보다는 안정과 안락, 지금 이대로의 삶과 자신의 신앙생활의 업적이 너무나 소중한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이름만 부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게 될 것이므로, 이방인으로써 자신의 '자범죄'는 해결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죄악을 해결받고자 하는 자는 부활의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앞으로 달려 나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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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요셉

등록일
2023-11-30 20:49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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