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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기독교인 앞에 야곱의 예표로 오신 그리스도!

기독교인 앞에 야곱의 예표로 오신 그리스도!

본문:창세기323-33:1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한사람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많은 민족이 태어날 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 하셨다 그러나 그는 무자 하였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으로 여종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먼저 낳은 것이다. 그러나 때가 이르러서 사라를 통하여 약속의 자녀 이삭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이삭은 순종의 자녀로서 이스라엘 땅에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먼저 태어난 이스마엘은 어느 쪽에 속하는가?

 

이삭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의 자녀라면 이스마엘 율법아래 갇혀서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의 종노릇하는 육신의 자녀 바로 율법아래서 사는 백성들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예수께서 오셔서 당신이 하실 일들을 알려주기 전에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삭을 통하여 에서와 야곱을 낳았다. 하나님께서는 먼저도 육신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를 예표하여 아들 둘을 주시더니, 이삭을 통해서도 아들 둘을 쌍태로 주셨다. 이 뜻은 즉 이삭’(약속하신 예수)을 통하여 큰 아들 에서를 먼저 주셨다. 그리고 야곱이 곧이어 그의 발꿈치를 잡고 뒤따라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작은 자야곱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큰 자 에서는 미워하고 작은아들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하였다(9:11-13).

 

이는 인간의 시각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당신이 하실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으로 하나는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한들 그릇 주제에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냐고 토기장이에게 힐문 할 것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깨버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9:19-24참조).

 

여기서 먼저 태어난 큰자를 뜻하는 것은 예수의 피흘림을 통하여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된 이방 기독교인들을 놓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예수를 통해 먼저 태어난 큰자로서 육신으로 보면 출중하고 들 나귀처럼 활달한 자들이다. 그리고 육체의 배고픔(팥죽 한 그릇)과 먹고 살아야하는 육신의 소욕들을 이기지 못하고, 하늘의 축복권 영생하는 것(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육에 속한 땅에 것)에 넘어가서 진자들 곧 기독교인들인 것이다.

 

다시 요약하자면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장자의 명분인 하늘의 축복 곧 하나님아들을 통하여 영생하는 것(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을 선택하고 행하고 살아야 하는데,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인 육신의 소욕에 져서 성령을 따라서 살기 보다는 땅의 소욕과 옛 자아에 이기지 못하고 졌다는 뜻이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에 싸워서 이겨야 한다(벧후2:19).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판 에서가 된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미리 아시고 이방인들을 성령을 거역하고 지은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야곱 같은 자를 선택해서 쓰시겠다는 뜻으로 야곱을 내세운 것이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과 달리 마음 판이 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태어나면서부터 죄악을 먹고 마시고 살아 왔기 때문에 마음 판이 죄악으로 단단하게 여물어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을 가리켜서 개와 돼지라고 불렀다. 이렇게 표현 한 것은 죄를 토하고 씻어 놓고서도 다시 더러운 데로 가서 죄악을 도로 먹고 그자라에 눕는다는 뜻이다.(벧후2:22참조). 따라서 이방인들은 피 흘리기까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마음 상태를 한번 들여다보라! 어느 누가 성령을 거역하지 않고 뜻대로 산자가 있는가?

 

이방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백성들로서 성령을 소멸하거나 거역하지 말고 끝까지 행하며 따라서 살아야 구원에 이를 수가 있다(5:16). 성령의 법은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적질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였을 지라도 겉으로는 도적질과 간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예수께서는 너희가 마음을 먹은 순간 이미 범죄를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인간이 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을 미리 찾아내어 주시면서 지키라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마음속에 있는 본심은 숨긴 체 사람들 보기에 좋으라고 아닌 척! 참고 겉포장으로 선한 척! 할 뿐이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마음의 본심자체를 따라서 살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어떤 자가 마음속에서부터 본심이 성령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지키고 행하며 살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런 실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따라서 살지 못하는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고 있으면 좋으련만, 성령으로 구원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으니 정말 큰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는 마치 유대인들이 편법을 써서 율법을 지켰다고 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죄인이 되어 있어야 했는데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똑 같은 이치이다(3:20참조).

 

기독교인들이 착각하기를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이름을 부르면 자신들의 원죄 자범죄 모두 다 깨끗하게 사해 지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마음은 율법으로 보호를 받고 죄를 사함 받은 적이 없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예수 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지만 유대인들처럼 마음 판이 깨끗하지 못하다. 하여 죽은 영’(옛 자아)이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에 예수의 이름은 율법아래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 때문에 이방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까지 해결해 주지 않는다. 이방인들은 영적인 백성들로서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의 영이 되어 다시 오셔서 성령을 거역한 죄를 사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각각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위계질서가 철저한 곳이다. 하나님께서도 당신 스스로 질서와 법을 세우시고 당신부터도 철저하게 지키면서 준행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영들의 세계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좋은 예가 루시엘이 위계질서를 범하고 자기 자리를 이탈하다가 루시퍼로 떨어져서 사단이 된 것처럼 말이다. 때문에 예수께서도 당신에게 주어진 일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백성들이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오신 예수이름으로서 그의 피의 공로로 원죄만 사함 받았을 뿐이지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까지 사해 주지 않는다. 이는 자리를 이탈한 불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방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한 자범죄는 누가 어떻게 감당하며 사해 주실 것인가? 이는 사도바울 속에 예수께서 영으로 들어가셔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지막 이천년이 지난 시점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중의 한사람을 선택 하셔서 인격을 입으시고 다시 오신 것이다. 그리고 오실 때 야곱 같은 자를 찾아서 그의 속에 들어 오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큰 자)'에서'는 미워하고 (작은 자)'야곱'을 사랑하고 선택하셨는지 하나님의 의중을 한번 살펴보자!

 

야곱은 형 에서와 다르게 장자의 축복 권을 빼앗은 사기꾼이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 자신의 재산을 늘려서 챙기고자 순수하지 못하게 머리를 쓴 교활하고 계산적인 자이다. 그리고 본문32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의 처자들과 종들과 재물을 가지고 자기 고향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에서가 야곱을 치기위해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야곱이 형을 두려워하며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한다. 하여 사자들에게 부탁하기를 형 에서를 만나거든 먼저 제물을 보이고 그 다음에는 여종들과 자신의 아내 레아와 라헬을 보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먼저 보낸 뒤에 항상 야곱이 뒤에 있다고 전해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려워서 자신은 뒤에 남아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두려움을 고하고 축복해 달라고 밤새워서 천사와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까지 야곱이 행한 본심을 한번보자! 자신이 두려운 나머지 자기가 감당하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 여기서도 야비하게 재물과 종과 아내들을 순서대로 보내는 모습을 본다. 이는 전형적인 이방인의 죄악의 특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야곱이 자기가 잘못한 것은 솔직하게 형에게 보이고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이 다 잃을 각오를 하였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본심을 형이 알게 되면 형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시키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잃게 될까봐 두려운 나머지, 우선 형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재물과 여자를 앞세워서 형과의 관계를 풀어 보려고 한 것이다.

 

인간의 본심은 자신의 이득을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래서 본심이 드러나면 배척을 당하고 모든 것을 잃을까봐 본심은 수면 아래로 감추고 좋은 포장지만 내놓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곱도 머리를 쓴 것이다. 그러나 야곱이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얍복강 가에서 밤새워 천사와 씨름을 한 것이다. 지금은 영적인 시대이기 때문에 육안으로 천사들을 볼수 없지만, 구약에는 육적인 시대였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사 하실 때는 항상 천사를 사용하여 역사를 한 것이다.

 

여기서 야곱이 한 행위를 잘 살펴보면, 그가 사기꾼이요 야비하기 짝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책임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한 것이다. 하여 두려움의 극복과 모든 일이 해결 될 때까지, 환도 뼈가 위골이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매달려서 승부를 본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형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주셨고, 야곱 또한 두려워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정면으로 형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이삭은 순종의 자녀로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은 모두다 야곱과 같은 기질을 가졌기 때문에 이방 기독교인들 앞에 오신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의 야비한 죄악을 보고 건져 주어야 하기 때문에 야곱 같은 죄인을 선택 하셔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연단하신 후에 그의 죄를 깨끗하게 하시고 이방 기독교인들을 죄에서 구원 할 수 있는 구원자로 만드신 것이다.

 

야곱이 비록 야비하고 계산적이며 사기꾼 이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시인하여 하나님 앞과 에서에게도 무릎을 굻은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축복을 받아 낸 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하늘의 축복권)을 팥죽 한 그릇(육신의 배고픔과 안위와 영달)에 팔아먹은 에서같이 먼저 태어난 큰 자를 미워한 것이다. 그리고 야곱은 비록 야비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와서 자신과의 싸움(세상 것들)에서 이기고,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장자권을 누리게 된 야곱을 사랑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앞으로 이방인들의 구원이 이렇게 이루어 질 것을 그때에 이미 예정해 놓으신 것이다. 따라서 야곱같이 하고 나오는 작은 자 둘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마음가운데 보내 주시므로 말미암아, 이방 기독교인들을 성령을 거역한 죄에서 건져 내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여 기독교인들 모두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나와야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2:10). 그러나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어 영원히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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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사라

등록일
2023-11-3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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