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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그리스도의 예표인 야곱

그리스도의 예표인 야곱

창세기331~11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을 만들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가 많이 먹어 자식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끊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약속의 자식으로 이삭이 태어났다. 그 전에 여종 하갈로부터 태어난 이스마엘은 육신적인 자녀로 이삭을 괴롭게 하여 쫓겨난다. 이삭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예수의 예표라고 한다면, 이스마엘은 율법 아래에서 힘들게 죄의 종노릇하는 육신의 백성인 유대인을 상징한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에게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주셨다. 이들이 배속에서부터 아직 태어나지도 않아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은 이미 큰 자는 미워하고 작은아들 야곱을 선택하고 사랑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9:11~13].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다. 에서는 잘 생기고 덩치도 있고 큰아들이라서 이삭은 그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뒤따라 나왔으며, 자라면서 어머니 치마 뒤에 있는 것을 볼 때 에서보다 연약하여 이삭의 마음에는 차지 않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친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야곱과 에서를 통해 당신이 하실 일들을 드러내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것을 인간의 시각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귀히 쓰면 귀한 것이고, 천히 쓰면 천한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이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하나님께 따질 수가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항상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표를 주시는데, 이삭은 바로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의 예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삭은 순종의 아들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를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도 순종하였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한편 에서와 야곱은 이방 기독교인들과 그리스도를 예표이다. 이방인 중에서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의 이름을 불러서 그의 피 흘림으로 인하여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영적인 백성이 된 자들이 바로 현재의 기독교인들이다. 이들은 성령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에서와 같이 육신으로는 신앙생활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는 자들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육신의 소욕과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마치 에서가 배가 고파서 동생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까지 가볍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넘어가서 이것이 하늘의 축복을 포기하는 행위인지 에서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행위는 축복을 포기하는 것이나 같다. 오늘날 대부분 기독교인들도 육신의 소욕과 세상욕심 때문에 넘어지는 자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이방 기독교인들은 성령을 따라서 사는 것이 하늘의 축복이다. 따라서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하늘의 축복을 팔지 말고 이겨야 한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기 때문에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벧후2:19].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방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에서처럼 장자의 명분을 팔고 있다.

 

한편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마음 판은 완전히 다르다.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율법으로 마음을 보호를 받았지만, 이방인들은 마음을 보호받은 것이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서 죄악을 먹고 마시면서 살아왔기에 그 마음 판이 죄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다. 유대인들은 이런 이방인들을 개돼지라며 상종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자신과 피 흘리기까지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마음 상태를 보면 어느 누구도 성령의 뜻대로 살고 있는 자는 지금까지 아무도 없다.

 

이렇게 이방 기독교인들의 깜깜한 죄악의 시대에 구원을 위해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가운데 오셨다. 왜냐하면 육체가 없는 영은 스스로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의 몸으로 들어가 그 마음을 주관하고 그 입을 통해 말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 중에 한 사람을 택하셨고, 그 사람의 모든 죄악을 다 제거하신 후에 그 마음을 붙잡고 생명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영이 되셨기에 인간의 마음속에 오셔서 그 인간을 지배하신 후에 이방 기독교인들을 죄악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아가 되신 것이다.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마음속에 죄악을 찌르는 반석이다.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위선 즉, 겉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그 속에 감추고 있는 더러움 죄악을 지적을 했다. 그들이 자신의 죄악을 지적받을 때, 시인하고 인정하여 예수를 찾아 나온다면 살 수 있지만, 그들은 반대로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이방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어긴 죄악을 지적당할 때, 그분을 배척할 것인지 시인할 것이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감히 당신이 뭔데 남의 죄악을 지적하는 거야!' 하면서 화를 내고 돌아설 것이다. 자신들이 못났다고 하는 자들만 마음에 찔림을 받아 자기의 죄를 인정하면서 그리스도에게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방 기독교인 마음속에는 가나안 일곱 족속 같은 악한 영이 자리 잡고 있어, 자신의 모든 것을 순수하게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맨 처음에는 가장 약한 죄를 지적할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이 쉬울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고,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 등은누구나 지을수 밖에 없고 또한 눈에 보이는 겉으로 드러난 죄악이기 때문에 시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죄악은 너무 미약하여 죄를 지었다는 괴로움이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야곱이 모든것을 책임지고 죽기 싫으니까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은 재물과 종을 먼저 앞세워서 해보려고 마음을 먹은것과 같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사람의마음속에서 죄를 짓게하는 본질에 해당되는 죄악을 찾아내어 끝까지 책망하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릴 것이다. 이때 그 사람은 자기의 부끄러움이 드러낼 때마다 마음속이 괴로울 것이다. 이때부터 자신과 싸워야 할 것이고,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지가 많이 손상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계속 인정하여 좋은 이미지를 포기하고 더 용기를 내서 숨은 죄악을 그리스도 앞으로 들고 나가야 한다. 이것도 역시 본질적인 죄악은 아니다. 마치 야곱이 레아와 라헬을 내세운 것 같이 소중한 것이지만, 자기의 목숨은 아직 아니다.

 

이렇게 자기 이미지가 좋지 않고 더 이상 숨기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인간은 스스로 죄악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여 주실 때, 그 죄악을 시인하고 인정해야 빛으로 조금이나마 죄악을 알 수가 있다. 그것도 오직 빚으로 오신 그리스도만이 더 예리한 칼이 되어서 그 마음속에 죄악을 계속 찌를 것이다. 어떠한 말씀을 듣더라도 이것이 모두 자기의 잘못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만약 억울하다고 계속 변명을 하면 그 마음속에 근심이 생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사사건건 모든 것을 더 세밀하게 지적하시고 그 마음을 괴롭게 한다. 이때에 그 사람의 심정을 죽을 맛이 될 것이다.

 

이 문제를 야곱에게서 찾자면 야곱이 형 에서가 자신을 죽이려고 오는 것이 무서워 사생결단하여 압복 강가에서 만난 천사를 붙잡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놓아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심정으로 나아갔듯이, 이방 기독교인들도 그리스도 앞에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들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끝까지 자신과 싸움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인정하고 시인하면 그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는 죄악을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깨닫게 해 주실 것이다. 그 누구도 죄악을 스스로 알 수는 없지만,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정확히 죄악을 말씀해야 주실 때 시인하고 인정하면 된다. 야곱이 형 에서가 왔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앞에 나아가 자기가 잘못하였다고 행동으로 뉘우치고 앞으로 달려간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해야 한다. 그 뒤 오히려 에서가 야곱을 용서하고 무사히 고향으로 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와 같이 야곱이 자기를 포기하고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 것이다. 야비함의 상징인 야곱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셨고 그의 아들 열두 명은 이스라엘 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이방 기독교인들도 최종적으로는 자신들의 본질 자신의 죄악을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인격적으로 솔직히 시인하면,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신다. 이렇게 자신을 완전히 반납한 자는 옛 주인이 떠나고 새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좌정하신다. 바로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이루어질 구원의 과정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은 이방인은 그 모든 삶이 바뀌어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새 주인으로 지배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과거 자신과 같이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해주면서 그들을 어둠에서 건져 내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비밀을 누가 알 수 있을까? 놀랍게도 지금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당신들이 생각지 못하고 있을 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통해 역사하고 계신다. 결국 각 사람은 자신과 싸움에서 야곱처럼 이기고 나와야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싸움에서 이긴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2:10]. 에서처럼 팥죽 한 그릇에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고 그 죄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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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3-12-01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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