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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성령과 그리스도영이 다른 이유

성령과 그리스도영이 다른 이유

요한복음 14:1-31

 

기독교인들은 기본적으로 삼위일체 교리와 더불어 사도바울이 받은 그리스도의 영을 성령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자들의 착각이다. 기독교의 기본교리인 삼위일체교리는 요한복음 14장의 말씀들을 근거로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며, 곧 보내실 보혜사 성령 또한 하나로 보고 있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과 그리스도가 하나였다고 한다면, 예수께서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니라 직접 스스로 오신다는 말을 쓰지 않고 저는 이라고 하였다. 이는 성령(아버지 영)과 자신의 구분과 위계를 확실하게 나타냄 이려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아버지와 하나라고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믿으면 그 자체로 이스라엘민족에서 추방당함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인 예수께서 자신들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그들을 믿게끔, 두렵지 않게끔 하기 위하여 아버지와 하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행적을 보면 마치 율법을 어기는 것 같지만, 율법의 참의미 전달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를 위하였고, 아버지를 향한 제사에 가식과 행위들에 분노하였으며, 외식으로 의로워진 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 무너진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새우셨다. 다시 말해 1차원적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던 율법을,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과 심정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는지 인간으로써는 율법으로 온전해질 수 없으니 자신을 통하여 아버지께 나아가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최종 뜻을 순종함으로써 죄 없는 피로 마귀의 발아래서 모든 인류의 영을 구원하셨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고, 그 이후에 예수의 피의 권세로 누구든지 예수이름을 부르면 성령을 받아 마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 자신들을 동일시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을 동일하게 보면 안 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동일하게 여긴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알아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율법을 지켜온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혈통으로 선택받아 자연스럽게 태어나면서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그래서 모든 문화와 법이 하나님아래 속해있었고, 십계와 모세오경 그리고 선지자들의 말들을 기초로 613가지의 율법이 구성되어있다. 즉 그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법의 테두리에 있는 민족들인 것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이스라엘 땅에 오셨을 때, ‘내 백성을 구하러 오셨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자기 아버지의 백성)을 구하러 오셨음을 밝히셨다. 여기서도 내 백성이란 말에 오해가 있을 줄 안다. 하나님과 아들이 하나가 아니라면 왜 내 백성이라고 하였는가? 그리고 과연 이스라엘 백성만 백성이었다면 왜 우리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았는가? 라고 말이다.

 

첫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는 예수께서는 아들로써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해보자면 한 왕국에 왕자가 왕인 아버지의 권능을 이행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고 곧 그 왕국이 훗날 자신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영원한 것이며, 대를 이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신들의 백성을 하늘나라로 인도하는 것에 최종 뜻이 있다.

 

둘째, 이방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마귀에게서 승리하신 예수이름을 불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 그저 모든 것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믿는 자들을 하여금 적절하게 사용되었을 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적도 없을뿐더러 보호를 받은 적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이란 말은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그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고 그 법의 보호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 해당됐다.

 

그러나 예수께서 피 흘려 마귀를 합법적으로 이기시고 모든 인류는 예수이름만 부르게 된다면,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 알게 하는 것이 이방인들에게 성령께서 하신 역할이다. 쉽게 말해 불신자가 신자가 되어 이제야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다. 즉 우리 이방인들은 성령을 받고나서야 하나님법의 태두리 안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음은 구원의 증표이며, 방언과 은사는 그 성화의 증거라도 말하고 있는데,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는 자신 속에 올라오는 욕망과 죄악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나는 깨끗하다고 합리화 하면서, 인지를 피하기 때문이다. 이는 바리새인들 마냥 스스로 의로움에 빠져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자신들이 구원받고 완성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께서 오시니 말뿐인 행위와, 외식이 드러났고, 율법을 어겨 병들거나 소외받은 자들만 예수 앞으로 나와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우리도 이와 같지만 순서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에 말씀을 주었고 오늘날 우리는 영적인 시대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이름을 불러 성령을 받은 자들이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자아와 욕망과 타협하여 성령을 말씀대로 성령의 뜻대로 살지 못한다. 그래서 다시 아버지(성령)의 참된 뜻을 알려줄 중보자가 필요하다.

 

하늘나라 위계질서상 아버지가 아버지의 뜻을 이야기하지는 못한다. 구약에서도 그랬듯이 반드시 선지자나 그 후에 예수께서 오셔 아버지의 참뜻을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무너진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세우러, 다시 한 번 영적인 자기백성을 구원하러, 영적으로 도적같이 오셨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땅에 오신 육적인 예수께서 부활하여, 영으로 오셔 우리의 자아(죽은 영)를 몰아내고 우리의 주인이 되어주시길 바라는 것이다.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 율법아래 산적이 없기 때문에, 삶과 문화, 법속에 어떠한 제제도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을 자기 이익과 욕망위주로 살아가다보니 이방인들은 누군가를 믿고 따르기보다도 자신을 믿고 자신의 가치관을 신념으로 살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이 그들의 마음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죄가 들어서도 빨리 털어 버릴 수 있었고 그들은 날마다 번제로 자범죄를 씻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께서 오셔 원죄를 해결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 앞에 나오기만 해도 씻음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 이방인들은 죄에 대한 개념이 세상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죄를 지은사람에게 용서를 고백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죄를 지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개념이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개, 돼지처럼 죄를 먹고 마시면서 죄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이방인의 특성이다. 그렇다보니 누굴 대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다보니 자아가 누구보다도 깊게 뿌리박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에 예수이름을 부르고 성령을 받았더라도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한테 귀를 기울이게 되어 믿음에서 넘어지고 성령을 따라 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가장 대표적으로 설명해 주는 게 이방인들에 의한 성령과 그리스도의 대한 해석이다. 분명 성령을 받고 따라 살면서, 자신의 욕망을 어찌할지 몰라 괴로워했다면, 그나마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었고 이런 자들은 끝까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갔다. 그래서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믿음의 계보가 끊이지 않게 쓰임 받고, 종의 구원을 받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가지는 의미가 사랑과 관용이다 보니, 하나님의 법(성령의 법)과 섭리 또한 사랑과 관용으로 자신들 입맛에 맞게 변형시켜, 해석하고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며, 자신들 속에 있는 무시무시한 욕망과 죄악들은 간과 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자신이 하나님을 따라 살고자 했다면, 성령의 말씀대로 따라 살고자 했으나, 자신 속에 올라오는 죄악들로 괴로워하며, 항상 선을 갈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처럼 외식으로 의로워진 자들은 이미 완벽하다며, 자신들이 해석한 예수의 의미로 성령의법을 교리대로 지켰다며, 이러한 이야기는 듣지도 않으려고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글과 문맥, 그리고 인간이 세운 교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믿는 것을 참 의미를 마음에 두셨듯이,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언제나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방인이기에 마음이 부패하여, 마음의 귀를 기울이기도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을 위해 믿는 자기백성을 위해,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오셨으니, 자기의 마음의 병을 털어놓고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같은 뜻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계실 때는 하나이지만, 인간에게 오실 때는 반드시 위계가 나뉜다. 우리는 이스라엘 땅에 오신 예수를 신으로 모시고 그것을 붙잡고 구원받았다고 외쳐봤자 실상은 반쪽짜리 구원밖에 되지 않는다. 원죄는 해결되었으나, 자범죄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적인 백성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범죄를 날마다 해결해주실 분이 필요하다. 그것이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 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마음속에 주인이 되어 항상 마음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고 아버지의 섭리를 먼저 세우시고 그 뒤에 나의 욕망들을 합리적으로 조곤조곤 왜 하면 안 되는지, 해도 반드시 돌이켜 나의 한계를 알고 합리적으로 포기할 수 있게끔 해주신다.

 

인간은 부족하다 한도 끝도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신으로 모시고 끝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를 온전하게 믿기 위하여, 오신 나의 어머니 같은 존재이며, 친구이자, 나의 중보자 나의 모든 욕망과 궁금증을 해결해주며 나를 온전하게 하나님()으로 이끌 나의 참된 주인이자 목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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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요셉

등록일
2023-12-01 20:40
조회
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