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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구원의 의미!

구원의 의미!

누가복음 13 23~30

 

예수께서 그 당시에 구원받는 자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는 길은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라고 할 정도로 주님을 잘 아는 사람에게조차 냉정하게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구원에 관한 모든 열쇠는 하나님 아들이 갖고 계시는데, 그분이 받아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놀랍고도 무서운 말씀이다.

 

이 땅에 살다가 언젠가는 죽음을 이르는 인간은 구원을 받지 못하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면, 구원 문제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없다. ‘구원은 사전적으로는 어떤 곳(상황)에서 구출되고 해방된다는 것을 말한다. 성경적 의미로는 마귀의 지배하에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경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자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에 말씀하고 있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책이다.

 

한편 오늘날의 기독교인은 자신의 구원을 너무나 쉽게 확신하고 있다.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불신자와 다르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인식될 뿐만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의 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 예수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라는 말씀이 기록돼 있기에, 이를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불신이라 하며 구원에 대하여 한 치의 의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간혹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마다 말씀을 더 읽고 기도하여 자신의 의심을 떨쳐버리는 것이 최상책이라 여기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이러한 구원관은 종교개혁을 일으킨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뒤 수차례의 종교 회의 통해 크게 두 종류의 구원론이 정립되었다. ,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측(칼빈주의)과 그래도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믿겠다는 의지를 발휘해야만 하나님께서도 응답하신다는 것(알미니안주의)으로 크게 양분되어져 있다. 개신교는 그 안에서 여러 교파로 나누어져 자신의 교리가 정통이며 성경적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구원관은 이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주장한 것을 통합한 것일 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한낱 인간의 주장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실 인간의 구원에 대한 과정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림과 같이 보여주셨다. 의인의 혈통에서 태어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씀하셨고, 그 약속은 야곱을 통해 이루셨다. 야곱 자손 70명이 애굽 땅에 정착하여 430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200만 명이나 되는 큰 민족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초기에 요셉의 보호 아래 대접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유월절 사건을 통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장자가 죽는 재앙을 면하고 홍해를 건너 광야에 가게 된다. 이때 애굽과 광야 사이에는 홍해라는 큰 장애물이 있었지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동원하여 바닷물을 바람으로 막으시어 그들은 안전하게 건너갔지만 뒤를 쫓던 바로와 애굽 군사들은 물에 수장된다.

 

이 사건을 오늘날 기독교인의 상황으로 해석하면, 애굽은 영적으로는 마귀가 지배하고 있는 이 세상에 해당한다. 그리고 어린 양에 해당하는 예수께서 흠 없는 피를 흘려주심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마귀의 발아래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1차적인 구원이다. 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담이 지었던 원죄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것 같이, 이방인은 예수의 이름만 불러도 그의 피의 공로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세상 임금(마귀)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은 열흘 만에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불신으로 인해 바란 광야에서 무려 사십 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애굽을 탈출할 때 성인 된 자는 모두 멸망하고, 그 후손들이 요단강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된다. 또한 그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받아 비로소 그 율법을 지키며 살아갈 의무를 가진 하나님의 육적 백성이 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마치 유대인의 광야 생활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열두 지파가 텐트 생활을 하면서 각각 조금씩 다른 문화를 형성하듯이 오늘날 교회는 여러 교파로 나누어져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세상을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애굽)을 동경하며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살고 있다. 기독교인은 성령을 받았는데, 성령은 그들에게 영적 율법 역할을 하신다. 성령 따라 살아야 할 의무를 가진 기독교인은 모두가 지금은 하나님의 영적 백성이다.

 

그 뒤 모세가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그런데 홍해는 쉽게 건너왔지만, 요단강은 그들이 발을 딛기 전까지 물이 넘실넘실 넘치고 있었다. 그들이 법궤를 메고 믿음을 가지고 거침없이 물에 들어가자 비로소 그 강물이 거치고 그들이 건널 수가 있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유대인들은 가나안 일곱 족속과 끊임없는 싸움을 통해 그들을 몰아내고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정복하였다.

 

현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은 앞으로 종교 생활(광야)을 끝내고 종착역인 가나안을 향해 가야 할 과정이 남아 있다. 이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믿음을 보여야 한다. 홍해는 쉽게 건넜지만, 요단강은 믿음이 없이는 건너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가나안 땅에 일곱 족속이 있듯이, 기독교인은 최종적으로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내야 한다. 이 싸움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를 의지하며 그 싸움에서 이겼듯이,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할 때 비로소 그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다.

 

출애굽 사건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인간의 구원 과정이 확연히 드러난다. 먼저 모세를 통해 받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된 유대인은 그 율법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뜻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유대인의 구원은 반드시 육으로 오신 예수를 믿어야 완성이 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지켜 구원을 이루려고만 했지 정작 자신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눈앞에서 배척하여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게 되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율법을 주실 때 장차 되어질 모든 일을 알려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인간의 진실 된 마음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첫 것은 모형(율법)으로 주시고, 그 뒤 진짜인 둘째(예수) 것을 주셨다. 그런데 모형을 진짜로 판단한 그들은 둘째로 오신 예수를 그 외모나 행동을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이미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이 의롭게 되었다고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구약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했던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면, 신약은 그 율법을 완성하려고 오신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유대인의 복음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인은 이러한 유대인의 실패를 전혀 알지 못한 체, 유대인의 복음에 해당하는 신약 말씀을 그대로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여 자기의 구원을 합리화시키고 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바울이 교회 서신을 통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바울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불렀던 이방인들도 유대인과 같이 성령을 받았다. 그리고 끝까지 바울을 믿고 따랐던 이방 기독교인들도 구원이 완성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울은 믿고 따랐지만, 궁극적으로는 바울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말씀을 듣고 성령뿐만 아니라 은사를 받아 엄청난 체험을 한 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교만해져 자신들도 성령 받았기에 바울을 무시하고 자신의 아성을 쌓는 상황이 발생하였다고, 또한 많은 자들이 바울을 떠났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을 통해 계속 이러한 자들을 책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자들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은 되었지만, 결국 세상으로 가게 되어 구원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 뒤 바울이 죽게 되자 바울로 인한 구원은 더 이상 전승되지 않고 끝나게 되었다.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지금의 기독교인은 누군가를 통해 예수를 전해 듣고 성령을 받기는 했지만, 그 당시 바울의 따르던 자와는 전혀 다른 상태이다.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현재 자신이 성령 따라 살고 있는 지를 스스로 검증하면 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교회에 바치고 공동으로 사용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다. 지금 아무리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성령 따라 살자고 금식을 하고 별의별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자신의 말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이방인의 구원은 어떻게 완성되는 것인가? 기독교인은 예수의 이름을 불러 그의 핏값으로 원죄를 사함 받고 그 뒤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적 백성이 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마귀의 발아래에서 나온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구원이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다. 결국 이방인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 해결이 되는데, 놀랍게도 그분은 십자가에 죽으셨던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여 하늘에 계시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으로 이 땅에 다시 오셨다. , 바울과 같이 이방인의 한 사람 속에 영으로 오시어 그의 마음을 붙잡아 말씀하고 계신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이렇게 놀라운 일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유대인의 구원 과정을 깊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신다. 오직 마음을 낮추고 자신을 못난 자로 여기는 자만이 이 말씀을 자신의 복음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하늘나라를 향해 있는 자를 찾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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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요한

등록일
2023-11-30 19:58
조회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