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23-30
선을 향한 태도
위 구절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께 나아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했으나, 예수께서 자녀의 떡을 취해 개들에게 주는 게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자, 수로보니게 여인은 인정하며 개들도 자녀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에 대해 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다, 예수님의 테스트를 잘 통과했다. 혹은 예수님이 너무 야박하셨다. 라는 등 인간의 생각으로 가지각색 여러 방면으로 해석을 하지만, 정작 이러한 관점들은 인간(악), 주님(선)을 이해 못하고 내놓는 인간기준에서의 관점일 뿐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빛과 어둠의 차이를 극명하게 이해한다면 오늘날처럼 당 짓고, 부패되며, 세상과 타협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이 임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님 말씀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단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부활하신 사실만 인정하면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피 흘림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마귀 발아래서 나와 성령을 따라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의 기준인 율법을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 것들을 멀리하였고, 율법대로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그들은 구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세상문물과 이방인들의 유입으로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게 되어 율법을 어긴 죄로 몸과 마음이 병들어있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기백성들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에 육체로 오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자신이 율법을 어겨 죄로 괴로워하는 자들을 구원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몇몇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았는데, 예수께서 이들의 믿음이 크시다고 하셨다. 이들이 이방인임에도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예수의 이야기나 행적만 듣고도 예수를 자신들보다 월등히 앞선 존재로 인정했기 때문에, 말씀만 하여도, 이뤄지는걸 믿겠다고 한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도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사는 이방세계의 삶과 유대인의 삶을 비교했을 터이고, 그들이 자신들에 비해서 얼마나 정결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한 그들을 구원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정결하고 완벽하신 분일지 생각해봤을 것이다.
즉 자기 마음속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예수는 완벽하신분이라며 차이를 극명하게하고 자신의 딸을 어떻게 해서든 살리고자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께 나아갔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테스트하기 위해 위와 같은 말을 하셨고, 수로보니게 여인은 참고 지혜로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자신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고 마음에 있는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내놓은 해석들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기독교인들은 결코 마음에서 선과 악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대다수가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해서 머리로, 계획적으로, 또는 그것을 좋은 말로 지혜로써 넘긴다고 할 것이나 이것은 결코 선과 악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계획하여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들, 즉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항상 겉과 속이 다르다.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머릿속에서 언제나 나 자신을 속이고 그 상황에 맞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은 절대적으로 나 자신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에, 급박한 상황이나,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언제든지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그 하나의 예가 바로 시간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성령의 감화 감동이 약해지고,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여, 하나님 일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일에 신경 쓰는 것이다.
처음 성령을 받았을 때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위해 살 것 같았지만 성령의 뜻대로 살다가는 내 자신의 유익과 계속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세상 반, 성령 반 나누게 되고 결국에는 말과 생각뿐인 신앙이 된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1순위는 항상 나 자신이 되어버려 오늘날 이런 형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이방인들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살려면 성령을 회복해야하는데, 그렇기 위해서는 빛과 어둠, 선과 악의 극명한 차이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과 주님의 극명한 차이를 알아야 하는데, 마음속에 죽은 영(자아)이 주인인 이방인들에게 이는 결코 불가능 하다. 자신을 주님을 위해 아무리 희생하려고 노력해 봐도 생각과 마음이 따로 움직여 결국에는 나 자신을 위한 마음과 행동이 나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을 위하여 부활하여 영이 되시어 그리스도 영으로써 우리 앞에 인격적으로 오셨다.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마음의 자아(죽은 영)를 합법적으로 무너뜨리시고 왜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하는지, 왜 인간스스로 살면 안 되는지, 인간의 생각과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큰 차이인지 알려주시어, 인간들 스스로가 얼마나 무력하고, 그리스도를 필요할 수밖에 없게끔 행동과 능력 그리고 결과로써 보여주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능력으로 인간으로써는 해결 못할 문제를 해결하심에도 나와 그리스도의 격차를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백부장과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와 자신들의 엄청난 차이를 알고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한 것처럼 해야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그들이 만약 예수가 못미덥고 자신들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선(빛)을 향한 태도는 내가 인간이기에 얼마나 무력하고, 부족하고, 악하고, 이기적인지 나의 한계를 알고, 완벽하신 주님께 “나는 너무나 무력하기에 당신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고 나를 반납하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고 그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