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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자들의 이야기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제목 :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말씀 : 고린도전서 12 : 31


기독교인들은 성령의 은사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은사를 주시는 이유와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치 은사를 받은 것은 기독교 신앙생활 하는 자에게 부속품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면서 은사는 구원받은 자가 받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오늘 기독교인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에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바울은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을 좀 더 되짚어 보면, 왜? 성령으로 구원에 이르고 그 은사로 인하여 구원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을 말하지 않고,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라고 하였을까? 하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고, 무조건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방인들은 성령을 주신 의미도 모르고, 또한 왜? 성령을 주셨는지를 전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고 알아볼 마음조차도 없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실상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오직 부활하여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면 성령의 역할과 성령의 은사를 알 수 없다.


좀더 심도 있게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는, 인간을 통하여 악을 드러내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요1 3:8). 혹자는 말하기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고, 인간의 잣대로 판단 받으실 분이 아니고, 인간과 같은 육의 존재 아니라, 영(靈)적인 존재이시다. 즉, 영적인 말씀을 영으로 이해하고 받아야 하는데, 그 자체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서 만드신 다음에, 하나님의 생기(生氣)를 불어넣어서 생령(生靈)이 되었고, 하나님과 소통하도록 만들어진 피조물 가운데 유일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인간의 편리한 대로 생각대로 하나님을 자신들의 틀 안에 가두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절대 아니시다.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서 범죄 함으로, 생령(生靈)이었던, 인간이 그 영(靈)이 ‘죽은 영’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약 1 : 17). 결국, 하나님은 영(靈)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면, 즉시 악이 밖에서 기다린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말하고 있다(창 4:7). 하나님을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면, 바로 악이 호시탐탐(虎視眈眈)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은 마귀의 유혹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고 나니, 결국 마귀의 졸개가 되어 마귀의 하수인으로 살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의 영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 영을 살리기 위하여 흠 없는 피를 마귀에게 내어 주어서 인간을 살린 것이 바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겪으시고 죽으신 이유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영은 다시금, 본래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 영을 주장하시게 되었다. 즉, 인간은 흙으로 육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속에 임재(臨齋)하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영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누구도 그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은 씻을 수 없는 죄악으로 인하여 인간은 누구도 그 죄의 짐을 벗을 수 없다. 오직 아들을 믿지 않으면 그 죄의 짐(원죄: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라 조상이 지은 죄가 인간의 DNA 속에 흐르고 있다)은 결단코, 해결될 수 없다. 단지 오직 예수를 부르면 그의 피의 대가로 원죄에서 해방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증표로 성령을 주신 것이고 그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말씀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이제부터 믿음의 길로 들어선 것을 말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이제 하나님 백성이 되었고, 백성으로서 마음을 다하여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이것을 가르쳐 “영적인 율법”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 여러 가지 것을 실제로 보여 주신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신다(고전 12:7).


백성이 되어서 살다 보니, 무수한 많은 악의 침범이 있는 것을, 아시고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믿음에 굳건하게 서도록 하셨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것을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영(靈)은 주인이 하나님이신 반면에, 인간의 혼(魂)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오늘 많은 지도자가 영과 혼을 하나로 생각하고 원죄를 해결 받은 것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설명하고,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는 일이 전혀 다르다. 역할이 엄연히 다르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보자. 이 원리를 알려면 유대인의 구원 여정을 살펴봐야 우리 자신을 자세히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아서 선민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들은 율법을 육체에 받은 것인데 그 이유는 육체가 죄악의 통로이기 때문에, 육체에 율법을 주셔서 육신을, 지키도록 하셨다. 그 이유는 육신의 것은 땅의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것과는 전혀 반대이다. 하늘의 뜻과 정반대인 육신 원하는 바를 통제하여 결국 죄를 짓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가 없다. 율법을 누구도 지킬 수 없으므로 아들이 올 때 아들 앞으로 나오라고 하는 것인데 이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율법을 거역함으로 육신의 모든 질병이 나타나고, 질병에 걸린 이들은 그 사회에서 제외는 되는 아픔을 당하게 되고, 이들은 영의 문제보다도 삶에 너무나 힘들어서 예수를 찾게 되었고, 육신의 질병을 해결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아울러 구원에 이르는 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이는 육신으로 율법을 지킨 것으로, 의로 삼아서 오히려 아들 앞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 자기 의로 높아져 있던 자들이다.


유대인들은 이미 율법의 보호를 받았기 때문에 자범죄를 이방인과 같이 범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으면 구원에 이를수 있는 것인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렵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의 권역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감당하여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또한, 자신들이 생각하는 틀의 메시아를 고집하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고 더군다나 예수가 정말로 볼품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사 53:2),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범하고 다니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심지어 성전을 헐라고 까지 하는데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을수가 없었다. 그럼에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으로 오셨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시작이 우리 이방인들과 출발이 달랐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받지도 않았고, 율법 아래서 살아 보지도 않았다. 그 율법이 있는지도 모르고, 자유롭게 살았는데 이들의 마음은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지고, 상할 대로 상하여 져서, 어디 한군데를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여러 가지 상황을 만나서 예수 부르게 되었고 자신들의 육신의 문제를 해결 받았고, 거기에 성령까지도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은 그것이 구원이라고 믿고 있으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문제는 생각하지도 않고, 무시하고, 살아왔으며,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악의 증상들이 너무나 심각한 지경에 이를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받은 여러 가지 많은 은사를 최고로 알고 있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다.


성령으로 예수를 믿고(부르고) 신앙생활 하는 것을 무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사가 지속해서 변함없이, 평생토록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음속에 주인은 그리스도여야 한다. 그리스도가 주인 되어서 결국 휘장이 갈라짐과 같이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증보하셔야 한다. 그래야 성령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된다. 성령의 은사가,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신앙생활의 표징과 표적이 없다면 신앙생활을 지속해서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신앙생활만 지속하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주신 여러 가지 결과를 기본으로 하고, 이제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모시기 위하여, 지금까지 주셨던 은사를 기본으로 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데 유익하게 될수 있어야 한다.


분명히 바울은 말하기를 성령의 은사가 폐하여질 것을 말한다(고전 13:8~13).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폄하(貶下)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성령의 역사 없이 그리스도의 임재를 알 수 없고, 깨달을 수도 없다(고전 12:3). 성경을 보면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히 10:9). 또한, 아담은 오실 예수의 모형을 말하고 있다(롬 5 : 14). 그 이유는, 결국,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함이다. 인간 역사의 최고 선결과제는 인간이 죄에서 구원받는 일이다. 그런데 그 구원의 길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 모든 기준으로 정해졌다(요 14:6, 17:2~3). 하나님은 인간에게 오실 수 없으므로,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셨고, 인간의 당해야 할 모든 죄악을 모두 담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그 흠 없는 핏값으로 인간을 살리시고, 부활하셔서, 다시금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든지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속에 주인으로 들어오시겠다는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성령은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없이 주를 부를 수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누구도 신앙의 원칙을 지킬 수 없다. 결국, 성령의 은사로 인하여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가는 유익을 주시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고, 그 은사를 활용하여 기적 같은 일을 하고, 주의 일을 위해 헌신, 봉사, 충성했다고 하더라도 예복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불의한 자가 되고 마는 것이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마 7:22, 22:12, 14).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령의 은사로 그리스도를 만나는 지름길이 되기를 소망한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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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벧엘

등록일
2023-12-01 07:23
조회
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