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병든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다.

우리가 건강할 때는 병원을 찾지 않는다. 그러다가 몸에 이상이 생겨야 비로소 병원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나서 의사가 병명이 암이라고 알려주면 그때서야 혼비백산해서 난리법석을 떤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도 당당하던 사람이 자신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담당의사의 말에 그만 사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는 손을 싹싹 비비며 “의사선생님! 더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어제의 그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가고 의사 앞에서 손발을 싹싹 비비며 살려달라고 하는 것일까? 죽음 앞에서 어느 누가 초연하겠는가? 이것이 육신을 입은 인간의 모습이다.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서 죽음 앞에서 인간은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병으로 인하여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에 천하 없는 어떤 누구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런 환자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던지 듣게 되어 있다. 암세포에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술, 담배를 좋아하던 사람에게 “당신 술, 담배를 당장 끊지 않으면 죽는다”고 엄포를 놓게 되면 그는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서는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이런 사람이 자기 몸이 아프지 않는 상황에서 의사가 이런 지시를 내린다고 한다면 누가 그의 말을 듣고 술, 담배를 끊겠는가? 이것이 바로 인간이 두 얼굴을 가지고 사는 모습이다. 이런 결과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인간은 자신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쳐야만이 그제서야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세상이치를 예로 들어 설명해놓으신 부분이 있다. 바로 마태복음:9:12절 말씀으로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하시는 말씀이다. 위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평소에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끼는 자는 절대로 의원을 찾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는 자는 의원을 날마다 찾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자는 영혼의 치료자이신 주님을 날마다 찾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주님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병명을 바로 알려 주시려고 애쓰시는 영혼의 치료자에게 돌팔매질을 해되는 것이다. 그런 소리는 나에게 하지 말고 “당신 자신이나 열심히 돌보시요”하면서 말이다.


과연 이런 자가 자신의 몸속에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고 하는데도 의사를 향해서 이런 헛소리를 지껄였는가? 하는 것이다. 아마 병원에서 이런 진단을 받았다면 살려달라고 의사 선생님 앞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을 것이다. 그런데 몸뚱이보다 몇 십 배나 더 중요한 영혼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몸뚱이만 괜찮으면 단줄 알고 영혼을 치료해주실 주님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몸 밖에 걸치는 의복보다 몸뚱이가 더 낫고, 몸뚱이보다는 영혼이 더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성경에서 누차 읽었음직한 데도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현실만 생각할 뿐 인간의 사후세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허기사 영혼의 안내자들이라고 하는 목사들조차도, 성도들에게 “영혼의 때를 위하여!”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눈에 보이는 육신의 때만을 위하여 살도록 가르치고 있으니 더 말하면 무엇 하겠는가? 이 세상에 지음 받은 온갖 만물들이야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일생을 마감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은 인간만큼은 육신으로 사는 세상이 있고, 영적으로 사는 세상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만큼은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계시록에도 보면 첫 번째 죽음이 있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죽음이란 말 그대로 육신적으로 죽는 죽음을 뜻하는 말이고, 두 번째 죽음은 영으로 죽는 죽음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불신자들이야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지만, 믿는 자들이라면 이런 사실을 믿기 싫어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믿는다면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으로 의로워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율법으로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예수를 믿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것처럼, 오늘날 영적인 백성들인 현재의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것은 성령으로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부어주신 성령이 아니라, 도리어 성령으로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온갖 죄악을 깨닫고 장차 오실 영적인 하나님 아들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처럼(율법으로 구원 받았다고 주장함),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자꾸만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중한 병에 걸려있는지 진단하려면, 스스로가 성령을 얼마나 거역하고 살았는가를 가늠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이 처음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서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한 것은 전혀 기억을 못하면서 오로지 성령 받은 것만 내세워서 구원 받았다고 한다면 형평성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육신이 건강하다고 하여 자신의 영혼까지도 건강한줄 믿고 있다가는 큰 코 닥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출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성령을 가역하고 제 멋대로 살고자 할 때, 유대인들처럼  몸뚱이에 병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병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마음속에 찾아온 병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게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찾아낼 수 없다.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병을 찾아내실 분은 오로지 하나님 아들 한분뿐이시다. 하나님 아들은 마음속에 들어있는 병만 찾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직접 치료도 해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병을 진단받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들이 어찌나 교묘하게 거부하는지 진단만 해보자고 하는데도 이 핑계 저 핑계 온갖 핑계를 다 대면서 진단 받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반 강제적으로 병명을 진단 받았다 할지라도 인간들이 얼마나 악하고 게으른지 그것을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왜 병든 자냐는 것이다. 육신이 이렇게 멀쩡한데 말이다” 그러면서 영혼의 치료자 앞으로 나오기를 도무지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입으로는 연신 주여! 주여!를 외치고 있는 것이 오늘날 믿는 자들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오늘 네 자신은 과연 어느 자리에 서 있는가?” 주님은 오늘도 나에게 그것을 묻고 계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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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31 21:10
조회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