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아들을 믿지 못하면 나를 버릴 수 없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먼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에서 먼저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자는, 하나님쪽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만을 바라고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있다.

하나님쪽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겠다는 말은, 인간에게 환란과 핍박이 닥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하고 환란과 핍박을 통해서 아들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환란과 핍박은 결국 아들을 믿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은혜란? 그저 자신은 손가락하나 까닥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주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풍랑이 몰아치자 대범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치는 것이다. 이런 자는 은혜 받을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 했던것은, 사실 남편(가족)이라는 거대한 풍랑을 일으켜서 그들에게 다가갈 때, 그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자신의 겉사람을 남편(가족들)앞에 미련없이 던져버리라는 뜻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 믿음이 없다보니까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자 자신을 그 파도에 내맡기지 못하고 그만 줄행랑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고도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줄을 몰라서 그만 물거품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은혜란? 인간들은 손하나 까딱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주시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정말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거대한 풍랑을 일으켜서 다가 가게 되면, 주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혼비백산 도망치고 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대한 풍랑을 일으켜서 인간들에게 찾아가는 것은, 인간들 모두가 아직은 죄악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한쪽에서는 거대한 풍랑이라는 파고를 만들어서 인간의 숨통을 조여주는 것으로, 자신의 속사람을 버리고 아들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은혜의 방편이다. 그런데 아들을 믿는 믿음이 없다보니 자신을 파고에 내맡기지 못하고 도망을 치고 마는 것이다.

야곱이 아직도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에서라는 거대한 풍랑을 일으켜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주셨던 것처럼 말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야곱은 칼을 들고 달려오는 에서의 무리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야곱 입장에서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다가올 줄은 감히 상상도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도리어 인간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안다면 아마 모두가 깜짝놀랄 것이다.

성경에는 그런 사실들을 무수히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그런 사실에 대하여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요셉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요셉이 장차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장차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꿈으로 보여 주셨다. 요셉은 오직 그 꿈만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그가 애굽에 팔려가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보디발 집에서 일어났던 일하며, 감옥에서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일까지도 전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긴체로 말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꿈으로 보여주셨던 모든 것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이루어 주셨다. 요셉이 수십년의 고통을 모두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역시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 오신 분이지만, 그가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 것이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일이다. 이런 일들이 어찌 인간들 머리로는 이해가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거대한 풍랑을 일으켜서 인간들을 찾아가는 것도 실상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들 쪽에서는 그런 은혜를 답갑지 않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면 아무 평지풍파도 일으키지 말고 아주 편한 방법으로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이 죄 아래 살고 있는 이상 그렇게 아무 평지풍파없이 베풀어 주실 은혜는 없다는 것이다. 혹시 인간이 죄인이 아니라면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 마귀 꾐에 넘어가 모두 죄아래 살고 있는 이상, 편한 방법으로는 은혜가 베풀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설교 한편만 듣고 나도 "은혜 많이 받았습니까? 혹은 은혜가 됩니까?" 하고 묻는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오늘 설교 말씀을 듣고 육신의 즐거움이 있었습니까? 혹은 육신의 희망이 보입니까?" 하고 묻는 것이나 똑같은 말이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란? 내가 죽느냐? 사느냐?하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란 어차피 나와 하나님 사이에서 내가 누구를 택할 것인가를 놓고 줄다리기 하는 것이다.

인간들 모두가 편한 방법으로 천국을 가고 싶지, 어느 누가 고통을 받으면서 천국을 가고 싶어하겠는가? 따라서 인간들 쪽에서 바램은, 하나님께서 이왕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면 제발 아프지 않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도 할말이 있다. 그렇다면 너희가 내 아들을 아무 의심없이 믿어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아들을 믿을 수 없다. 인간들 힘으로는 도저히 아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도 풍랑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인간들은 그런 은혜라면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만 두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영생하려거든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속담에도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들로서는 반드시 거센풍랑을 겪어야 만이 아들을 믿고, 자신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자들은 현재 자신에게 불어닥치고 있는 풍랑이 거세다고 느껴질 수록 그것이 축복의 전주곡임을 알고, 아들을 믿고 의연하게 대처하라는 것이다.

현재 자신의 가정에 바람만 불고 있지, 아직 풍랑이 거세게 일지 않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아직도 연약하다는 증거다.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내사 본인들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더 큰 시험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견딜만큼 강해지면 반드시 거센풍랑은 몰아치게 되어 있다. 그때 반드시 아들을 믿고 있어야 모든 풍랑을 이겨낼 수 있다. 풍랑은 아들을 믿을 수 있는 은혜의 도구인 것이다.

요셉이 아무잘못도 없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캄캄한 어둠속에서 삼년의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나왔을 때, 그를 기다는 것은 그가 아무잘못도 없이 억울한 옥살이를 한 것을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들에게 닥치는 경한 환란은 장차 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강단에 오신 하나님 아들을 믿고, 나에게 어떤 상황이 펼처지더라도 나를 과감하게 던져서 가족들에게 나를 주어 버리고, 오직 아들을 믿고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아들 또한 여러분들을 의에 길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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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26 21:22
조회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