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고통을 통해서라도 아들앞에 달려 나오라!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께서 마태복음 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 하신다. 물론 이 말씀은 율법 아래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 아래 살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대로 율법이라는 무거운 죄 아래 갇혀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율법아래서 지은 모든 죄를 내가 모두 담당해 줄테니까 다 내게로 나오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신들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던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모두 구원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말씀이 적용이 되려면, 적어도 기독교인들 모두가 유대인들처럼 죄 아래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생각으로는, 자신들 모두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아서 구원 받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은 죄 아래 살고 있는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 성령 아래 살면서 성령의 법을 어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 역시 율법을 어기고 살면서도 자신들이 율법을 어긴 죄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예수께서 오셔서 알려주시니까 그때서야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성령 받은 것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이지, 그 성령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했을 때에는 자신들이 어떤 형벌에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오셔야 비로소 이문제도 풀어 주시는 것이다.

영적인 백성들이 영적인 짐을 벗어버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영적인 주님 앞에 달려 나와야 한다. 이것은 율법 아래 살던 유대인들이 율법을 범하여 몸에 병이 들어서 고통을 당하다가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앞에 달려 나와서 문제를 해결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주님 앞에 스스로 나올 수가 없고 오직 무거운 짐(죄)을 진자만이 나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육신으로나 마음으로라도 고통을 당하지 않고 살려고 한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은 육신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 하여 가장 싫어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차라리 마음으로 고통당하는 것이 더 낫다 하여 마음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이것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나타내 주는 그림으로써 육적인 백성과 영적인 백성들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밑그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속으로 곰곰이 되새김질 해보아야 한다. 속으로 되새김질을 해볼수록 문제의 발단이 어디서 시작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고, 문제의 시작을 알게 되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도 보이게 된다.

그런데 속으로 되새김질을 하고 있자니 여간 갑갑한 게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골치 아픈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서 심지어는 뇌물이라도 써서 갑갑하고, 골치 아픈 문제를 당장에 해결 짓고 마는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마음이 느긋해진다. 그렇게 되면 당장에 아쉬운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만큼 주님을 붙잡고자 하는 마음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는 것이 사람들 보기에는 창피하고 당시에는 죽을 맛이지만, 그로 인하여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보다 더한 축복은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이방인들은 그런 골치 아픈 문제를 마음으로 되새기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당시 자신이 혈루 증을 앓지 않고 있었다면 과연 예수님 앞에 나왔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엄한 율법 아래서 얼마나 모진 고통을 다 겪으면서 살아왔겠냐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런 뼈저린 아픔과 고통이 있었기에 그녀는 예수님 앞에 과감하게 달려 나왔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영적인 백성답게 어느 누가 마음속으로 자신의 고통을 곱씹으며, 가족들의 고통까지도 모두 싸 짊어지고 영적인 아들 앞에 달려 나올 것이냐가 문제다.

마음속의 고통이 얼마나 괴롭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영적인 하나님 아들 앞에 무조건 달려 나올 것이고, 마음속으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들처럼 전혀 아들을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 성도들 중에도 가족들의 고통과 자신의 문제 때문에 심한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자는 반드시 아들을 찾아 나올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가족들이 고통당하는 것이 모두 가족들이 잘못해서 당하는 고통으로 치부를 하고 있거나, 본인은 가족들의 고통에 대하여 별로 마음 아파할 것이 없다고 느끼는 자들은 영적인 아들을 찾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마음이 별로 고통스럽지 않은데, 굳이 왜 영적인 아들을 찾아 나와야 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아쉬운 것이 없으면 아들을 찾지 않을 것이고, 아쉬운 것이 있으면 아들을 찾게 된다는 원리인데, 이런 원리가 자신들에게 적용되기까지는 뼈를 깎는 아픔이 동반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까지 가기 전에 빨리 두 손 들고 아들 앞에 나와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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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26 21:23
조회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