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꿈이 있는 자는 두렵지 않다.

꿈은 인간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게 해준다. 가령,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에게는 오늘 못케면 내일 또다시 켈 수 있다는 꿈이 있기에 그들은 그것을 희망으로 안고 살아간다. 만약 그들이 오늘 산삼을 못케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할 때, 그들의 삶은 대단히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 힘겨운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대박을 꿈을 안고 계속해서 로또복권을 사는 것 역시, 어려운 직장생활로는 당장에 부를 거머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단 한번의 기회로 인생역전을 노리고 복권을 구입하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계속해서 그일을 반복하는 것은 꿈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그들이 꿈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복권을 구입하는 것은, 그마나 그런 꿈마저도 없으면 자신의 미래가 너무 불안하기 때문에 복권이라도 구입해서 그 꿈을 잃지 않으려는 희망 때문이다. 만약에 그들에게 이런 희망마저 사라진다면 그들은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술과 담배 혹은 도박으로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 할 것이다.

날마다 학교를 오가는 학생들의 꿈은 일요일을 집에서 쉴 수 있다는 꿈이다. 그리고 운동선수들의 꿈은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연예인들의 꿈은 자신의 작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는 것이다. 돈 많은 사람들의 꿈은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한낮 썩어질 꿈인데도 인간들은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몸부림을 친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꿈은 무엇일까? 아마 모두가 천국가기를 바라는 꿈일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꿈은 이 세상에서 아무탈없이 편한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생각이고, 정말로 자신이 영생하기를 바란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탈없이 편하게 살 생각은 포기해야 한다.

이 세상을 아무탈없이 편하게 살려면 영생을 포기 해야 하고, 자신이 정말로 영생 얻기를 바란다면 바로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 어차피 육과 영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라서, 이 두가지가 한꺼번에 모두 이루어 질 수는 없다. 따라서 어느 한쪽은 반드시 포기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본인은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모두가 자신들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줄 알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한 착각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령 받은 것을 구원 받은 것으로 알고, 자신들을 모두 포기했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타락이 이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구원의 영이었더라면, 기독교인들이 세상으로부터 이처럼 질타를 받지는 안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생명이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또 세상것을 탐하려 들겠는가? 그리고 자신에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썩어질것을 붙잡겠다고 지옥갈 인생들하고 아웅다웅 싸움을 벌이겠는가?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것을 탐하려 드는 것을 보면, 성령은 기독교인들에게 구원의 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아들 앞으로 인도하기 위한 몽학선생 역할로 오신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이 구원의 영이 아니시라면, 기독교인들은 장차 자신들 앞에 오실 아들을 기다리는 꿈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꿈이 없다면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지금 기독교인들은 아들을 기다리는 꿈보다는 자신들이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착각에 빠져서 모두가 죽고난 후에는 천국갈 수 있다는 허왕된 꿈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가 간밤에 허왕된 꿈을 꾸고 나면 흔히들 개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그 말은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는 말이다. 그것은 악한 영들도 얼마든지 허황된 꿈을 꾸도록 하여 인간들을 자기가 원하는대로 끌고 가기 위해서 그런 허왕된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꿈이 아니라면, 허왕 된 꿈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꿈은 절대 허왕된 개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현 불가능한 것을 꿈으로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한번 말씀 하신 것들을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바로 이것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면, 나는 머리가 두쪽이 나도 그가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다고 하여 혹은 꿈으로 보여 주셨다고 하여 그것이 당장에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끝가지 말씀하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이 당장에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느 것은 금방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어느 것은 십수년 후에 이루어 주실것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자고로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 것들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믿는 것이 믿음이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들을 수백 수천 년이 지나도 하나님께서는 일점 일획도 변함없이 모두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이다. 가령, 아브라함에게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런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말씀하신대로 출애굽 사건은 이렇게 하여 이루어 진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모두 거짓된 삶을 살고 있다보니 그 꿈역시 모두 허왕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참으로 우리의 꿈을 현실로 이루어 주실 분이 바로 우리 눈앞에 함께 계시니 감사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랬다치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우리의 꿈을 절망으로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나에게 믿는 곳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를 버릴 수 있다.
주머니에 돈이 가득들어 있으면 밥을 안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그 이유는, 언제든지 나는 밥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확실히 믿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를 언제든지 버릴 수가 있다. 그 이유역시 내가 믿고 있는 그분이 나를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금방 밥을 먹고나도 배가 고프다.
그 이유는, 당장에 배가 고파서 그러는게 아니라, 장차 배가 고파왔을 때 밥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미리 겁을 집어먹고 근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고 의지하는데가 없다보니까 다음에 올일을 미리 땡겨다 놓고 근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두고 사서 고생한다고 말하지 않던가?

이런 자는 절대로 자신을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 자들은 늘 불안초조에다 근심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것도, 자신 눈앞에 버젓이 주님이 와 계시는데도 입으로만 주님을 찾지, 정작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주님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미리부터 겁을 잔뜩 집어먹고 닥쳐올 내일일을 속으로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자꾸만 반복되는 것일까? 그것은 주님을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패단이다. 그럼 왜 주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이 아직도 죄인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정말로 죄인이란 사실을 아는 자라면 주님을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하다보니까 주님앞에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죄인이라 고백하고 주님앞에 손만 내밀면 바로 그곳에서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손길이 펼쳐지건만, 마음이 완악할 대로 완악해져 있는 인간들이 죽어도 주님 앞에 손을 내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말로 하자면 "죽어도 나는 죄인은 되기 싫고, 죽어도 나는 내주인에게 손을 내밀었으면 내밀지, 죽어도 주님에게는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다는 말이다." 참으로 한줌의 재만도 못한 것이 인생인데, 뭐가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지옥으로갈 운명이 그리도 질긴지 모르겠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자아를 버리지 않는 인생에게는 고생의 떡만이 그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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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26 21:23
조회
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