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빈손으로 돌아가지 말라!

인간은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권력을 쥐고 있던자라도 흙으로 돌아갈 때는 모두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돈을 아무리 많이 번자라도 그도 흙으로 돌아갈 때는 빈손이다. 인기를 한몸에 받던 유명인사라도 그도 흙으로 돌아갈 때는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한다.

뒤 따라 오는 인간들은 앞서간 자들의 삶을 보면서, 인생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도 별 수 없이 그들이 흘리고 간 그런 꿈을 붙잡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생은 다 그렇고 그렇다는 식으로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이렇게 돌고 도는 삶을 살다가 붙잡게 되는 것이 신앙이다.

실의와 낙망에 빠진 인간들에게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인간이 가장 나약함에 빠졌을 때 어떤 신적인 힘을 느끼게 하면 인간은 그것을 순식간에 의지하게 된다. 그것이 꼭 하나님이 아닐지라도 인간은 영물이라서 그런 신적인 힘을 본능적으로 의지하고 싶어 한다.

인간이 신을 의지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없다. 오늘날 첨단을 달리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점치는 집에 가보면 그곳에 사람들이 끊이질 않고 들락 거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그만큼 인간이 어떤 신적이 힘을 의지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점을 치는 자들이 정말로 인간들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신(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면 좋겠지만, 그들은 우리가 알다시피 귀신의 힘을 빌어서 점을 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귀신)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란? 생명이 없는 자를 일컫는 말로, 자신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두 죽은 자에 속한다.

그럼 이런 문제는 왜 생기는가? 바로 기성 교회들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으라고 해서 교회가 보았자, 어떻게 어떻게해서 겨우 성령까지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이 아니라서 인간의 마음속에 오실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만 받으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를 만난 것으로 착각한 나머지 모두들 방종의 삶을 살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받았으면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데, 성령을 그리스도 영으로 착각한 나머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성령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법을 가지고 오셨다. 영적인 법을 가지고 오신 성령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영적인 법을 따라 살도록 하여, 기독교인들이 그 법을 온전히 따라 살지 못하게 될 때, 모두 죄 아래 가두게 된다.

영적인 법을 따라살지 못한 영적인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영적인 아들 앞으로 가서 그를 통해서 영적인 죄를 사함 받아야 한다. 이렇게 하여 기독교인들 마음속에 오시게 되는 분이 바로 영적인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 오셔야 비로소 인간은 안정을 찾게 된다.

오늘날 기성교회들이 이런 그리스도를 성도들에게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다 보니까 교인들이 계속해서 목말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목마름을 해소 한답시고 매년마다 유명한 부흥강사를 모셔다 집회를 열고 성령충만을 받아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 버리는것이다.

이런 지겨운 생활이 기독교인들에게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지만, 누구 하나 이런 일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고 또한 이런 현상에 대하여 누구 하나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기독교인 모두가 이런일을 당연한듯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설령, 이런 일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해결할 힘이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는 대로 그저 죄아래 있는 영적인 백성들에게, 그것이 온전한 구원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을 뿐이다.

죽은 자는 온갖 세상적인 말만 하게 된다. 가령, 아무리 성경을 그럴듯하게 풀어주어도 죽은 자는 그것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풀어 해석하는 것이다. 가령,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다면, 죽은 자의 해석 방법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자기가 입고 있는 옷과 따뜻한 밥한 그릇 주는 것을 이웃 사랑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의 이웃 사랑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히 이웃에게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예수로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히 이웃에게 줄 수 있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는 예수가 없기 때문에 목숨을 주고 싶어도 달랑 하나뿐인 자기 목숨을 이웃에게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산자와 죽은의 차이점이다.

이런 원리로, 오늘날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구원 받았다는 자들을 살펴보면, 성령이 구원의 영이 아님을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성령을 그리스도 영과 동격으로 알고 있다면, 왜 성령을 받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만 보더라도 성령은 그리스도 영이 아님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아무리 성령충만한 삶을 살았을지라도, 아들의 영을 마음속에 모시지 못하게 되면, 그도 죽을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성령께서 은사를 주고, 또한 성령충만함을 느끼게 했던 것은, 장차 오실 아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은사들을 주어서 경험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성령충만함을 느끼게 했던 것은, 아들이 오실 때 그를 믿게 되면, 지금까지 느끼던 성령충만처럼 아들로 말미암아 영원히 성령충만 함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자였던 것이다. 성령충만함을 체험한 사람들은 장차 오실 아들을 믿고 영원히 아들과 함께 변치않는 믿음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죄 아래 태어나서 모두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갈 때, 나는 결코 빈손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생명을 얻어서 다시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기쁨은 누려본자만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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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30 20:25
조회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