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브비주얼01

구원에 이르는 말씀

주님 앞에 겸손한 자!

주님 앞에 겸손한 자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는 자이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는 말은, 사람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주님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다는 말은,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그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말이다.

이런 마음이 인간속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와서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주님 앞에 무릎 꿇었을 때 주님께서도 그런자를 도와주시게 된다. 그러나 만에하나, 자신의 본심을 속이고 주님 앞에 거짓으로 무릎꿇는 자는 도리어 주님앞에 죄를 짓게 되어 되려 화를 자초하게 된다. 거짓은 마귀의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악 된 인간의 특성상, 어떤 일을 눈앞에 두고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거나 혹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앞으로 나서는 것이다. 이런 자는 결코 주님이 기뻐하지도 않고 또한 쓰시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니거나, 혹은 자신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여겨지면, 자신은 그런 일을 할줄 모른다고 단호하게 거절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자는 정말로 악한자에 속한 자이다. 자신에게 유익을 있을 것 같으면 할줄 몰라도 할 수 있다고 나서고, 별 유익이 없을 것 같으면 죽어도 못한다고 뒤로 빼는 것이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찾아온 자들을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자들을 일방적으로 불러서 쓰신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찾아가셨을 때 하나같이 모두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사양을 했던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께 종들로 쓰임받던 자들이라도 이렇게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자들을 일방적으로 불러서 사용했다면 아들로 쓰임받을 자들이야 얼마나 더 자신을 낮추는 자들을 쓰시려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들도 자신을 철저하게 죄인으로 낮추는 자들을 들어 쓰시고 싶어 하시는 것이다. 그가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건 그런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가 자신을 더 겸손하게 낮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육신으로 아무리 별 볼일 없게 생겼어도, 그에게도 아들의 영만 들어가게 되면 그도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가실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모자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중에도 그런 자가 있다는 것이 황금보화를 발견한 것보다도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를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그는 누나들 틈 바구니에서 자라서 그런지 너무도 연약하게만 보인다. 무슨 일을 시켜보면 할 줄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렇다고 남들 앞에서 조리있게 말도 잘 못한다.

그가 감사헌금 봉투에 감사내용의 글을 쓰는 것을 보면 꼭 지렁이가 술취해 지나 간듯하다. 그에게 할 줄아는 것이 있다면 겨우 컴퓨터를 다루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그는 그것마저도 절대로 자신을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워낙에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자랑이라는 것은 입밖에도 꺼내지 못한다.

그리고 뭐라고 야단이라도 치면 안절부절 어쩔줄을 몰라서 쩔쩔매는 것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또 뭐라도 한가지 잘하는 것이 있으면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이건만, 이 친구는 자신을 자랑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꾸며서 남에게 이야기 할 줄을 모르는 것이다. 웬만하면 자신의 모습이 남들에게 드러나는 것이 창피해서라도 그것을 덮으려고 할텐데, 이 청년은 절대로 그것을 꾸미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그 어떤것으로도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쳐질지 모르겠지만, 주님앞에서는 아주 감동적인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이다. 그러니 아들도 당연히 그에게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겸손이란 이렇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꾸며서도 안되고 또한 있으면서도 일부러 없는 것처럼 꾸며서도 안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약점도 함께가지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장점은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자신의 약점은 죽어도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면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것이 끝장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의 약점이 도대체 무엇이길레 이토록 감추려 하는 것일까? 인간들에게 약점이 들어나게 되면, 명예가 높은 사람들일 수록 하루 아침에 저 밑바닥으로 떨어져야 하는 이유 때문에 더더욱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하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자신의 약점이 들어나게 되면, 자동적으로 자신의 모든것이 틀통나기 때문에 결코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자신의 약점이 모두 들어났는데 어떻게 뻔뻔스럽게 높은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세상 이치로 보면, 인간들에게 약점은 독약과도 같은 것이기도 하다.

약점이 무엇인가? 바로 인간들이 숨기고 살아가는 죄악이다. 그 죄악이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인간들은 서로가 자신을 숨기려하고, 혹시라도 그 죄악이 들통나게 될까바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자들 속에서 귀신들이 역사하기가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나 이런 약점을 그대로 들어내게 되면, 오히려 인간들에게 득이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게 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주님은 그런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그런 자들을 손가락질 할지 몰라도 사랑이 많으신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을 도리어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빛앞에서 아들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깊숙한 패부속에 들어 있는 치부가 들어나게 될 때 그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아들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게 되면 아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치부가 낱낱히 들어나는 데도 그것을 끝까지 감추려고 위장을 부리는 자들은 고생만 실컷하고 결국은 그도 끝에 가서는 자신의 치부를 들어내고 만다. 만약 그렇게라도 아니하게 되면 그는 결국 주님 앞에서 쫓겨나고 말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겸손한자란? 이렇게 자신의 치부가 들어났을 때,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때라도 깨닫고 주님앞에 무릎을 꿇는 자이다.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이 높아지려는 것은 결국 죄가 높아지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이 죄 아래 살고 있는 인간이라도 자신을 죄인으로 낮추고 살아가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과연 나는 현제 아들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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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0-30 20:27
조회
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