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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이르는 말씀

종의 신분과 아들의 신분!

종의 신분과 아들의 신분!

 

종으로서의 신앙생활은 아무리 열심히 잘해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열 번 잘하다가도 단 한번만 실수해도 종은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한 세상 법은 얼마든지 용서란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법을 만든 인간 자신도 불안전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한 법에는 절대 용서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과 달리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도 이런 개념이 확실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보니 하나님 백성들을 배나 지옥자식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세상 법에 도둑질 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때 세상 법은 사람들 눈만 피해서 도둑질 하면 누구도 모릅니다. 그리고 경찰에 체포되지만 않으면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절대 하나님 눈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마귀는 그걸 노리고 있다가 하나님께 참소하여 그에 대한 형벌을 받게 합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에 비해서 죄짓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교회다니기 때문에 착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입니다. 교회다닌다고 해서 착해지는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교회다녀서 착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악을 깨달아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이 모두 잘못 적용되어 교회만 다니면 무조건 착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법아래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가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아직도 법아래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법아래 살고 있다는 말은 곧 죄아래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종들은 원래 하나님을 두려워 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믿는 분들 중에도 아마 많은 분들이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불안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불안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곧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방종의 기회로 삼아서 죄에서 자유케 되었다고 떠드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대부분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해주셨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짓더라도 예수께서 모두 다 갚아주실 것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박옥수 목사가 이끌고 있는 기쁜 선교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아직도 법아래 살고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사해주셨다며 날마다 짓고 있는 죄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야말로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들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란 이름 앞에 유난히 벌벌 떠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당시 성경을 필사하던 학자들이 성경을 써내려가다가 여호와란 이름이 나오면 당장에 자세를 고쳐 앉아, 지금까지 쓰던 붓도 바꾸고 부동자세로 앉아 성경을 써내려갔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법아래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에는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들입니다.

 

위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법을 세상 법과 혼동하는데서 문제가 많습니다. 세상 법은 사람들 눈만 피해가면 되지만 하나님의 법은 사람들 눈만 피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법을 피해갈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법으로만 따진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 앞에 어느 누구도 온전히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마지막에 당신의 아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예수를 믿었으니까 이렇게 열심히 교회 다니다가 죽고 나면 사후에 예수께서 자신의 모든 죄를 사해주셔서 아마 자신도 첫째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으로 굳게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는 자들의 바램일 뿐,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방 기독교인들도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영적인 아들을 믿어야 비로소 법을 어긴 죄를 사함 받고 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예표로 오신 예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다면, 이방인들 앞에 야곱의 예표로 오시는 영적인 하나님 아들 또한 영적인 백성들의 율법의 완성자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누구도 지킬 수 없었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법 또한 마음이 부패한 이방인들로서는 어느 누구도 온전히 지킬 자가 없습니다.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가 채찍에 맞아주심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병든 자기 백성들의 죄악을 담당하셨다면, 이방인들 앞에 오실 영적인 하나님 아들은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거역하고 모두가 마음에 병이들어 죽게 생긴 것을 해결해주러 오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아들 앞에서 자신이 성령을 거역한 죄인이라고 고백하기만 하면 그들의 죄악을 모두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가 이방인들 앞에 오실 때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에 도적같이 영적으로 오신다고 표현 하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땅에만 하더라도 가짜 예수가 벌써 30여명이나 가까이 나타나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딜 가나 진짜가 오기전에 항상 가짜들이 먼저 와서 설치게 마련입니다. "멍석깔아 놓으니까 거짓들이 먼저와서 춤춘다"는 우리 속담처럼요 그러나 아무리 가짜가 진짜 흉내를 내려 해도, 한가지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짜들은 인간의 죄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짜 예수가 율법을 어긴 죄를 해결해 줄 수 없듯이, 오늘날에도 가짜 하나님 아들(예수)이 성령을 거역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든 자범 죄를 해결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진짜아들과 가짜아들을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는 아들로서의 삶과 종들의 삶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자입니다. 상속자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다 물려받는 뜻입니다. 따라서 아들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아버지로부터 쫓겨나지 않습니다. 설사, 자식이 맘에 들지 않아서 아들을 호적에서 파낸다 하더라도 부자지간의 관계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가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 모두가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는데 비해서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안식일 날 육체가 병든 자들을 찾아다니며 고치고 다닙니다. 육체가 병든 것은 그들이 율법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라본 유대인들이 예수를 미친놈 취급합니다. 당시 율법 아래 살던 자들로서는 당연히 예수가 미친놈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바라보면 예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 또한 성령의 법에 따라 매 주일날마다 예배당에 모여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고 온 영적인 아들은 주일날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에 사람들을 불러놓고 성령의 법을 거역한 죄인들을 찾아내서 그들의 마음속에든 병(죄)을 치료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본 기독교인들은 또 하나 가짜 예수가 나타났다며 모두가 미친놈 이단취급하며 수근수근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아들은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아버지께서 해야 할일을 아들이 대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집에 머슴살이 하는 종이 한사람 있었습니다. 이 머슴은 아주 일을 열심히 잘했습니다. 주인도 머슴이 일을 잘해서 아주 흡족해 했습니다. 그런데 이 머슴에게 흠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머슴이 일은 잘 하는데, 주인의 뜻을 전혀 헤아려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자기 고집대로만 일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를 꼭 양자 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워낙 고집이 세서 주인도 그를 맘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그 머슴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자네 고집만 꺾고 내 말대로 따라하면 내가 자네를 양자 삼아 아들로 맞이하여 전 재산을 자네에게 물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도 자기 고집과 자존심은 꺾을 수 없다며 주인의 청을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도 안타깝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주인은 좀 모자란 듯하지만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양자삼아 아들로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형태를 비유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자기 혼자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잘해도 주인의 뜻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일 잘하는 머슴에 불과합니다. 좀 모자라도 주인의 뜻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고 일하는 사람이 결국 주인의 맘에 들게 되어 양자로 입적하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열심히 성전에 나가 소와 양을 잡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몰라서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세리와 창녀들은 바리새인들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천한 사람들이었으나 어찌어찌하여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믿고 영생에 먼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신앙생활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대단히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이야!” 우리 집안은 자손대대로 목사집안이며 장로집안이라며 가문과 전통을 따지고, 더 나아가서 출신교단을 따지고, 교회를 따지고 목사가 어느 신학교 출신인가를 따지고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 왜 그토록 성전에 나가서 열심히 제사를 드리고도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을 믿지 못했는가를 깊이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원은 전통과 출신성분이 좋다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오래했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교회에서 높은 직책을 갖고 있다고 해서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낸 아들을 믿을 때만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종의 신분으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종들은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처럼 헛물만 켜고 말게 됩니다. 종들 밑에서는 오직 종들만 생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종들은 죽어도 주인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품속에서 나오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는 분입니다. 아들의 말씀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만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영적인 귀가 열려있는 분들은 듣고 깨닫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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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

bansuk

등록일
2023-11-01 20:22
조회
67